알브레히트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 I'에는 날개를 접은 채 깊은 수심에 잠긴 인물이 등장한다. 주변에는 기하학 도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그 도구들을 쥐어야 할 손은 턱을 괸 채 멈춰 서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 오래된 판화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찬란한 가능성을 품고서도 정작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고립과 우울의 방. 그 어두운 방안에 갇힌 청년들의 한숨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그늘이 된 지 오래다.

흔히 청년의 아픔을 두고 '나약함'이나 '의지 부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는 기성세대의 훈계는 이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릴 뿐이다. 그러나 시들어가는 잎사귀의 원인을 씨앗의 나약함에서만 찾는 정원사는 일류가 될 수 없다. 토양이 오염되고 햇볕이 차단되었다면, 그것은 숲 전체의 위기다. 청년 우울증과 고립은 개인의 취약성이 아닌, 경쟁 지상주의와 단절된 공동체가 낳은 엄연한 '사회적 질병'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마음의 문제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개념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개인의 정서적 영역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과도한 온정주의이며, 한정된 재정을 개인의 우울감을 달래는 데 쓰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진정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일리 있는 지적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대 사회의 고립이 지닌 치명성을 간과한 결과다.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된 상태에서의 자립은 성장이 아닌 방임에 가깝다. 무너진 다리를 방치한 채 강을 건너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가 최근 우울과 불안을 겪는 이들을 위해 전문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본격 시행한 것은 시의적절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오는 2026년 '심리상담 바우처사업'으로의 확대를 앞둔 이 정책은, 마음의 병을 방치했을 때 사회가 치러야 할 유무형의 비용을 선제적으로 예방하겠다는 국가적 결단이다. 이제는 정신과 문턱을 넘는 것이 패배의 낙인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 백성들의 굶주림과 질병을 구휼하던 '활인서(活人署)'처럼, 현대의 국가 역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기근을 구제할 책무가 있다. 심리 상담의 문턱을 낮추고 청년들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언덕을 만드는 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그것은 무너져 가는 공동체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가장 확실한 투자다. 청년의 마음을 보듬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 동력을 지키는 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인간은 서로를 위한 버팀목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홀로 서 있는 나무는 거센 바람에 쉽게 부러지지만, 뿌리가 얽힌 숲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국가가 청년들의 손을 잡아주는 '마음건강 국가책임제'는 그 거대한 숲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차가운 골방에서 홀로 울던 청년이 문을 열고 나와 마침내 온기를 느낄 때, 비로소 우리의 봄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