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저평가받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을 물으면 흔히 지정학적 리스크나 미흡한 주주환원율을 꼽는다. 정부가 세제 혜택을 내걸고 기업들의 자발적인 '밸류업'을 독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과연 돈을 더 많이 나눠주고 세금을 깎아준다고 해서 한국 증시의 고질병이 치유될 수 있을까. 진짜 문제는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신뢰의 부재'에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 기업의 이사회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현행 상법 제382조의3은 이사가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조항이 역설적이게도 소액주주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법적 방패막이가 되어왔다. 회사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이 분리되는 결정적 순간, 예컨대 알짜 사업부의 물적분할이나 불공정한 합병 비율 산정 과정에서 이사회는 지배주주의 편에 서서 결정을 내리더라도 "회사의 이익을 해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책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법이 이사들에게 대주주만을 바라보도록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동안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련 규정 개정을 통해 사외이사 등의 의무 선임 비율이 기존 이사 총수의 4분의 1(25%)에서 3분의 1(33.3%)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는 등 외형적인 통제 장치는 꾸준히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사회의 구성 비율을 아무리 바꾼들, 이사들이 짊어진 법적 의무의 대상이 여전히 '추상적인 회사'에만 머물러 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독립적인 사외이사라 한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없는 상태에서는 지배주주의 독주를 견제할 명분도, 동인도 찾기 어렵다.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진정한 자본시장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핵심 열쇠는 상법 개정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장하는 장치 없이 추진되는 밸류업 프로그램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시장의 룰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지 않은 채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만을 기대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사의 충실의무가 확대될 경우 소송 남발로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가깝다. 경영 판단의 원칙이 합리적으로 적용된다면 정상적인 경영 활동은 보호받을 수 있으며, 오히려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는 얄팍한 처방전 대신 수술대에 올라야 할 때다.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상법 개정이야말로 한국 증시가 '약세장'의 굴레를 벗고 진정한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