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여름, 유럽은 '문명의 취약성'을 처음 맨살로 느꼈다. 프랑스에서만 1만 5천 명이 넘는 노인이 폭염에 목숨을 잃었다. 에어컨도, 전력망도 충분히 갖춰진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비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계의 문제였다. 여름이 '그 정도로 뜨거워질 수 있다'는 가정 자체를 사회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텍사스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 텍사스 전력망 운영사 ERCOT는 2026년 6월 발표한 전망 보고서에서, 올여름 텍사스의 최대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인 약 92.2GW에 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숫자만 보면 밋밋하다. 그러나 맥락을 얹으면 숫자가 울린다. 텍사스는 이미 2021년 겨울 대정전으로 250명 안팎이 사망한 전력망 붕괴를 경험한 주다. 그 사고 이후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어 계통을 보강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여름이다. 방향이 바뀌었을 뿐, 위기의 문법은 동일하다.

폭염은 전력 수요를 두 방향에서 동시에 압박한다. 냉방 수요가 폭증하는 동시에, 고온은 송전선의 허용 전류를 낮추고 발전 효율을 떨어뜨린다. 강이 뜨거워지면 냉각수로 쓸 수 없어 원전과 화력발전소의 출력을 줄여야 한다. 수요는 치솟는데 공급은 쪼그라드는 구조적 가위 현상이다. ERCOT가 92.2GW를 걱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다. 공급 여력이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는 예비율 문제다.

물론 한국은 텍사스와 다르다는 반론이 있다. 텍사스는 독립 계통이어서 인접 주로부터 전력을 끌어오기 어렵다. 한국전력은 전국 단일 계통으로 운영되며, 정부는 매해 여름철 전력 수급 대책을 내놓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논리가 안심의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단일 계통은 연결된 만큼 취약하기도 하다. 한 곳의 대형 사고가 계통 전체를 흔드는 '도미노 정전'의 경로가 될 수 있다. 2011년 9월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랬다. 예비율 오판 하나가 순환 단전으로 이어졌고, 신호등이 꺼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기후변화는 인프라의 설계 가정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국의 전력 계통은 '역대급 폭염이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시나리오를 충분히 상정하고 설계되었는가. 냉방 수요가 급증하는 도심 고층 주거 밀집지의 변압기와 배전망은 그 부하를 버틸 수 있는가.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여름 야간 충전 수요가 새로운 피크를 만들어내는 현실은 반영되어 있는가. 이 물음들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기관이 지금 한국에 있는지, 솔직히 확신하기 어렵다.

기후 적응 인프라는 속성상 '사용되지 않을 때가 성공'인 투자다. 재난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준비가 충분했다는 증거가 아님에도, 예산을 쥔 손은 언제나 '이번 여름도 무사했다'는 이유로 다음 해 예비 투자를 미룬다. 텍사스도 그랬다. 2011년 겨울 대정전 이후 권고된 동계 설비 보강을 10년간 미루다 2021년 참사를 맞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저주는 예언 능력이 아니라 '믿게 만들지 못하는 능력'이었다. 텍사스 ERCOT의 92.2GW 예측치는 카산드라의 목소리다. 한국 전력 당국이 그 목소리를 트로이 사람들처럼 흘려듣지 않기를 바란다. 폭염은 예외적 기상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표준이 바뀌면 설계도도 바뀌어야 한다.

전력망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망가지고 나서야 존재가 드러난다. 그날 드러나지 않도록 지금 손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