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은 경첩째 뜯겨 있고, 마당엔 무릎 높이까지 잡초가 자랐다. 창문엔 검은 곰팡이 자국. 부산 동구의 한 골목 안쪽, 10년째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이 집 앞에서 동네 어르신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화재 위험, 쥐, 무단 침입. 빈집 하나가 골목 전체의 분위기를 바꾼다.

이런 집이 부산에만 1만 1,471호다. 7개 특별·광역시 가운데 가장 많다. 서울 6,711호, 대구 6,009호, 대전 4,991호가 그 뒤를 잇는다. 숫자만 보면 낡은 도시 문제 같지만, 틀렸다. 청년 주거난이 극심한 바로 그 도시들에서, 빈집은 가장 빠르게 활용 가능한 자원이기도 하다.

위험 시설에서 청년 주택으로 — 국내 재생 실험

서울 성북구는 수년째 방치됐던 단독주택 여러 채를 리모델링해 1인 청년 가구에 시세보다 낮은 임대료로 공급하는 사업을 진행해 왔다. 공가(空家)를 매입·임차한 뒤 수선 비용을 지원하고, 일정 기간 공공임대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집주인 입장에서도 빈집을 방치하다 발생하는 관리 비용과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어 호응이 나쁘지 않다고 현장 담당자들은 전한다.

부산 영도구의 사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언덕 위 좁은 골목에 늘어선 빈 집들을 예술인 레지던시와 소규모 작업실로 전환한 것이다. 물리적 재생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콘텐츠'를 심었다. 주말이면 외지 방문객이 찾아오고, 인근 상가에는 작게나마 손님이 생겼다. 빈집 한 채가 골목 경제의 모세혈관 역할을 시작한 셈이다.

일본·독일은 어떻게 했나 — 국제 비교가 주는 교훈

일본은 빈집 문제에서 한국보다 10년 이상 앞서 있다. 이미 전국 빈집 비율이 14%를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아키야 뱅크(空き家バンク)'라는 빈집 정보 플랫폼을 운영해 왔다. 지방 소멸 위기의 마을에서 빈집을 1엔에 양도하거나 이주 청년에게 수선 보조금을 주는 방식이다. 일부 지방 도시에서는 이 제도를 통해 수백 명의 청년 이주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가 나온다.

독일 라이프치히는 더 과감했다. 동독 시절 인구 감소로 도심 곳곳에 생긴 빈 건물들을 예술가·스타트업·사회적 기업에 저렴하게 임대하면서 도시 재생의 실험실로 삼았다. '임시 사용(Zwischennutzung)' 개념이 핵심이다. 완전한 개발이 아니라 일단 활용하고, 수요가 확인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유연한 접근이다.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공간을 살린 이 방식은 유럽 도시 재생 정책의 참조 모델이 됐다.

빈집 재생의 진짜 장벽 — 제도와 소유권

국내에서 빈집 재생이 더디게 진행되는 이유는 단순히 예산 부족이 아니다. 소유권 문제가 가장 큰 벽이다. 상당수 빈집은 상속 분쟁 중이거나 소유자 연락이 끊긴 상태다. 지자체가 직접 매입하려 해도 시세 산정 기준이 불분명하고, 소유자 동의 없이 강제 수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약하다. 2024년 기준으로 정부가 '빈집 정비 계획'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법령을 손질했지만, 실제 정비 실적이 계획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친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커뮤니티 공간 전환도 마찬가지다. 초기엔 각광받지만 운영 주체가 불분명하면 2~3년 안에 다시 방치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일본 아키야 뱅크 성공의 배경에는 지자체·민간·이주자를 잇는 전담 코디네이터 제도가 있었다. 공간을 고치는 것만큼, 고친 공간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사람과 구조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뜻이다.

부산의 골목 안 그 집은 아직 비어 있다. 하지만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청년 두 명이 공방을 열었다. 빈집 정비 사업 지원을 받아 고친 집이다. 골목에 처음으로 낮 시간대 불빛이 생겼다. 한 채가 바뀌자 이웃 집주인이 먼저 구청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재생은 법령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변화에서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