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15일, 닉슨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담담하게 선언했다. 달러와 금의 교환을 중단한다고. 브레턴우즈 체제의 마지막 못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인류는 실물에 묶이지 않은 화폐, 즉 약속만으로 굴러가는 돈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도 각국 중앙은행은 여전히 금을 산다. 쌓는다. 금고 깊숙이 넣어둔다. 마치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부적을 품고 다니는 것처럼.
세계금위원회(WGC)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104.4톤으로 세계 중앙은행 순위 39위에 머물고 있다. IMF와 유럽중앙은행(ECB)을 포함하면 41위로 밀린다. 2013년과 비교해 보유량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순위는 뒷걸음쳤다. 다른 나라들이 더 빠르게 금을 사들이는 동안 한국은 제자리를 지킨 셈이다. 숫자 하나가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
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이성을 비웃는다. 그것은 녹슬지 않고, 썩지 않으며, 불 속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는 금으로 만든 관 속에 누웠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을 찾아 대륙을 불태웠다. 케인스는 금본위제를 「야만의 유물」이라 불렀지만, 그 유물은 지금도 포트녹스의 지하 금고에서 차갑게 빛난다. 야만이라 불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 그것이 금의 본질적 역설이다.
물론 금 회의론자들의 논거는 탄탄하다. 금은 이자를 낳지 않는다. 배당도 없다. 산업적 쓰임은 제한적이고, 가격은 공포와 탐욕 사이를 오간다. 워런 버핏은 금을 두고 「땅을 파서 꺼낸 다음 다시 땅에 묻어두는 것」이라 비꼬았다. 비트코인이 등장한 뒤로는 「디지털 금」이라는 경쟁자까지 생겼다. 젊은 세대 투자자들에게 금은 할아버지의 자산이다.
그럼에도 나는 금의 완전한 퇴장을 믿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뢰가 흔들릴 때 인간은 언제나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 미국과 이란의 대치가 격화되고, 중동의 유조선이 공격을 받고, 지구 어딘가에서 39초 간격으로 지진이 건물을 무너뜨릴 때, 사람들은 클릭 한 번으로 생성된 숫자보다 손바닥 위의 무게를 원한다. 금은 수익률이 아니라 불안의 측정값이다. 세계가 불안할수록 금값은 오른다. 이것은 경제학보다 심리학에 가깝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대비 금 비중은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낮다. 미국·독일·이탈리아가 외환보유액의 60~70%를 금으로 채우는 동안, 한국은 한 자릿수 수준에 머문다는 분석이 나온다. 달러 자산 편중 전략이 안정적이었던 시절의 관성이다. 그러나 달러 패권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 탈달러화 논의가 브릭스(BRICS) 정상회의 단골 의제가 된 시대에, 그 관성이 언제까지 미덕일 수 있을지는 따져볼 일이다.
화폐란 무엇인가. 결국 집단적 믿음이다. 금본위제가 무너진 것은 금이 가치를 잃어서가 아니라, 성장하는 세계 경제를 감당할 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신뢰가 실물을 이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신뢰 자체가 균열을 일으키는 시대를 산다. AI가 일자리 지도를 다시 그리고, 알고리즘이 시장을 움직이며, 아무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금융 파생상품들이 지구를 떠돈다. 그 복잡계 안에서 금 한 덩이의 묵직함은 오히려 돌연 선명해진다.
104.4톤. 한국은행 금고 속 숫자는 작지 않다. 하지만 충분한지는 다른 질문이다. 금본위 신화가 흔들린다는 것은 금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 뿌리를 다시 물어야 할 시간이 왔다는 신호다. 닻을 잃은 배가 표류하지 않으려면, 무엇에 줄을 매야 하는지 스스로 답해야 한다.
황금은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돌려보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