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동력을 책임질 과학기술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첨단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정작 이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들은 이공계 연구실이 아닌 의과대학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인재 확보가 곧 국가의 안보이자 생존 전략이 된 지금, 극단적인 '의대 쏠림' 현상은 단순한 입시 트렌드를 넘어 국가 경쟁력의 근간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기로 부상했다.

'상위 1%'의 77%가 의대로…지표로 증명된 이공계 기피

교육계와 입시 분석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2025학년도 대학입시 정시 모집에서 자연계열 상위 1% 성적을 거둔 수험생의 무려 76.9%가 의과대학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래 산업의 주춧돌이 될 일반 이공계 학과를 선택한 비율은 10.3%에 불과했다. 최고 수준의 두뇌 10명 중 8명 가까이가 의료계로 향하고, 순수 과학 및 공학 분야를 선택한 이는 1명에 그친 셈이다. 이러한 편중 현상은 일시적 유행이 아닌 고착화된 흐름으로, 첨단 기술 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인적 자원 배분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안정한 미래와 상대적 박탈감, 왜 연구실을 떠나는가

이공계 기피와 의대 선호 현상의 이면에는 누적된 처우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공계 전공자들은 긴 학위 과정과 고된 연구 노동을 감내해야 하지만, 졸업 후 마주하는 일자리의 안정성과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파동은 과학기술계에 깊은 무력감을 안겼다. 연구 과제의 중단 가능성과 고용 불안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평생 면허가 보장되고 높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기대할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은 압도적인 대체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우수한 인재들에게 애국심이나 과학자로서의 사명감만을 요구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기술 주권 상실의 경고음, 체계적 보상 체계 마련해야

이공계 인재 유출은 단순한 인력 부족을 넘어 국가 기술 주권의 상실로 이어진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우리가 세계 시장을 선도해 온 분야마저 인재 공급 체계가 붕괴되면 순식간에 후발 주자들에게 추월당할 수 있다. 기술 격차가 곧 국력인 시대에 인재의 질적 저하는 곧 국가 경제의 쇠퇴를 의미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이공계 인재들에 대한 획기적인 처우 개선과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 연구원들의 정년 연장, 파격적인 성과 보상 제도 도입, 그리고 R&D 예산의 안정성 확보를 통해 "과학을 해도 미래가 안정적이다"라는 신뢰를 사회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인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보상과 비전이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의대 정원 확대 등 보건의료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공계 활성화를 위한 종합 대책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영토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공계 인재를 '비용'이 아닌 '가장 확실한 투자'로 바라보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