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그은 자오선 하나로 대서양 너머의 신대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로 양분되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잉크 한 줄이 문명의 운명을 갈랐던 대항해시대의 풍경은, 21세기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신대륙을 마주한 오늘날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다만 지금의 영토 분쟁은 물리적 대륙이 아닌, 보이지 않는 0과 1의 비트(bit) 세계, 즉 '데이터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다. 거대 플랫폼과 초거대 AI를 앞세운 빅테크 기업들이 보이지 않는 국경선을 그으며 인류의 지적 영토를 빠르게 선점해 나가는 형국이다.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술 기업들이 구축한 AI 모델은 인류의 지식을 빨아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들이 제공하는 편리함 이면에는 교묘한 '디지털 식민주의'의 그림자가 짙다. 우리의 언어와 역사, 문화적 맥락이 서구 중심의 데이터 필터를 거쳐 재해석될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타인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신적 유목민'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디지털 주권이 단순한 산업 보호를 넘어 국가의 생존과 정체성 수호의 문제로 직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거센 흐름 속에서 최근 타결된 한국과 유럽연합(EU)의 디지털통상협정(DTA)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번 한-EU DTA는 지난 2011년 발효된 기존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자상거래 관련 단 2개 조항을 대폭 확장하여 온라인 소비자 보호, 개인정보 보호, 사이버 보안 등 총 40여 개 조항으로 촘촘하게 구성되었다. 이는 거대 플랫폼의 일방적 독주에 맞서, 국경을 넘는 데이터 흐름 속에서도 우리 시민의 권리와 데이터 주권을 지켜낼 단단한 법적 방패막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주권이나 규제 장벽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기술 고립을 자초하고, 글로벌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경 없는 디지털 경제에서 과도한 빗장은 토종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규제 없는 자유는 강자의 독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진정한 혁신은 공정한 규칙의 운동장 위에서만 지속 가능하다. 디지털 주권은 성문을 닫아걸기 위한 빗장이 아니라, 우리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안전하게 키워내기 위한 온실의 유리벽과 같다.
한국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독자적인 검색 엔진과 토종 초거대 AI 모델을 보유한 국가다. 이는 문화적 다원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자, 빅테크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한-EU DTA라는 제도적 발판을 기반으로 삼아, 우리는 토종 AI 생태계를 육성하는 전략적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한글 데이터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우리만의 가치관과 윤리를 학습한 '소버린(Sovereign) AI'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야 할 때다.
동양의 고전 《장자》에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공간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디지털 영토라는 광활한 바다에서 우리가 스스로의 돛을 올리지 못한다면, 결국 타인의 배에 무임승차해 그들이 이끄는 대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주권이라는 닻을 깊이 내릴 때, 비로소 우리는 AI 시대라는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만의 항로를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새벽녘, 우리가 딛고 선 이 디지털 영토 위에 우리만의 별자리를 새겨 넣을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