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모퉁이,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어느 딥테크 스타트업의 연구실. 세계 최고 수준의 AI 기반 로봇 제어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대표의 책상 위에는 기술 개발 계획서 대신 자금 흐름표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기술력은 확실하고 해외에서도 협업 제안이 오는데, 당장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자금이 말라갑니다." 이 대표의 한숨은 현재 대한민국 딥테크 스타트업 생태계가 마주한 차가운 현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독보적인 원천기술을 확보하고도 상용화 단계의 이른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넘지 못해 고사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정부 정책 자금의 마중물 역할, 모태펀드의 전략적 재정립
정부도 이러한 벤처 투자 시장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대규모 자금 수혈에 나섰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2026년 4월 29일 '2026년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 사업을 통해 총 1조 7,548억 원 규모의 벤처펀드 60개 선정을 완료했다. 이번 출자는 특히 인공지능(AI)과 딥테크 분야에 집중되어,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장에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모태펀드의 근본적인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딥테크는 일반 IT 서비스나 플랫폼 비즈니스와 달리 연구개발(R&D)과 상용화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인내 자본(Patient Capital)'이 필수적이다. 단기적인 회수율에 집착하는 기존 투자 방식으로는 기술의 깊이를 담아내기 어렵다. 업계 전문가들은 초기 단계의 기술 검증부터 후속 투자까지 단절 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모태펀드가 마중물 역할을 넘어 민간의 모험자본을 끌어들이는 신뢰의 보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민간 CVC 활성화, 대기업의 자본과 글로벌 영토의 결합
정부의 정책 자금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결국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해서는 민간 자본, 특히 대기업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다. CVC는 단순한 재무적 투자를 넘어, 대기업이 보유한 글로벌 네트워크, 마케팅 채널, 그리고 실제 사업화 협력(PoC) 기회를 스타트업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파트너다.
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AI와 반도체, 로봇 등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해 CVC를 통한 전략적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흐름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제도적 장벽과 보수적인 투자 관행은 걸림돌로 지적된다. 관련 업계에서는 CVC가 보다 유연하게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투자 실패에 대한 면책 기준을 넓혀주는 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대기업의 풍부한 자금이 딥테크 분야로 본격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제언한다.
기술 패권 시대의 생존법, 장기적 투자 생태계 구축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날로 격화되는 지금, 딥테크 스타트업의 생존은 개별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기술 장벽이 높은 분야일수록 초기에 적절한 자금이 공급되지 않으면 국가적인 기술 주도권을 순식간에 상실할 위험이 크다. 단기 성과 중심의 투자 관행에서 벗어나 기술의 미래 가치를 정밀하게 평가하고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투자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 이유다.
정부의 정책적 결단과 민간 대기업의 전략적 협업이 맞물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데스밸리를 넘어 글로벌 시장의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오늘 밤 판교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 단순한 야근의 흔적이 아닌, 글로벌 기술 영토를 넓혀가는 희망의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