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의 한 스터디룸에서 만난 대학생 김민우(26·가명) 씨의 책상 위에는 미국 항공유학 안내서 대신 국내 비행훈련원 모집 요강이 놓여 있었다. 당초 올해 초 미국 텍사스주의 비행학교로 떠날 예정이었던 김씨는 지난해 말 유학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 달러당 원화 환율이 1,400원 선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학비와 현지 체재비를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김씨는 '미국에서 면장을 따려면 억 단위의 돈이 드는데, 고환율까지 겹치니 부모님께 도저히 손을 벌릴 수 없었다'며 '결국 국내로 눈을 돌려 대안을 찾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최근 가파르게 상승한 환율과 글로벌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청년층 사이에서 '유학 포기'가 잇따르고 있다. 과거라면 당연히 해외행 비행기에 올랐을 인재들이 이제는 국내에서 실리를 챙기는 실용적 선택을 하고 있다. 고환율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청년들의 커리어 경로를 바꾸어 놓으면서, 국내 전문 교육 기관과 실무 자격증 시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급부상하는 추세다.
고환율이 무너뜨린 '해외파'의 공식, 안방서 취득하는 글로벌 자격증
교육계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해외 어학연수나 유학을 준비하던 청년들의 발길이 국내 교육 프로그램으로 대거 선회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영어 교육 및 통번역 자격증이다. 과거에는 스펙을 쌓기 위해 캐나다나 미국 등지로 어학연수를 떠나 현지 대학에서 테솔(TESOL)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최근에는 국내에서 해외 대학의 테솔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내 교육기관과 협약된 온라인 및 오프라인 과정을 통해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의 테솔 자격이나 ITT(통번역능력인정시험)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식은 비용을 최대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취업준비생 이혜지(25·가명) 씨는 '해외 체재비와 학비를 합치면 수천만 원이 깨질 상황이었는데, 국내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동일한 해외 대학 명의의 자격증을 취득했다'며 '시간과 비용을 모두 아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학 대신 울진비행훈련원 선택… 조종사 꿈 키우지만 '타임빌딩' 장벽 여전
항공 분야 역시 고환율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영역 중 하나다. 민간 항공사 조종사가 되기 위해 미국이나 호주 등의 비행학교로 유학을 떠나던 예비 조종사들이 대거 국내 비행훈련원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특히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연계된 울진비행훈련원 등 국내 전문 비행훈련 기관에 입판하려는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해외 유학 대비 훈련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는 데다,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국내에서 이수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선택이 늘어난 만큼 새로운 현실적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비행 업계 관계자들은 단순히 비행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보다 취득 이후의 '타임빌딩(비행시간 축적)'이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항공사에 부기장으로 지원하려면 최소 250시간에서 1,000시간 이상의 비행경력이 필요한데, 영토가 좁고 군사 공역이 많은 한국의 특성상 국내에서 저렴하게 비행시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교관 활동 등을 통해 비용을 벌며 비행시간을 쌓을 수 있는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반면, 국내는 비행 기회 자체가 제한적이어서 자격증 취득 후에도 대기 상태에 머무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단순한 비용 절감 넘어선 '실용주의' 세대의 출현… 제도적 뒷받침 필요
전문가들은 고환율로 촉발된 청년들의 이 같은 행보가 단순한 '차선책 선택'을 넘어, 실리와 효율을 중시하는 MZ세대의 '실용주의적 커리어 설계'로 정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막연한 해외 유학의 환상에서 벗어나, 국내에서 가성비 높은 실무 역량을 빠르게 갖춘 뒤 곧바로 취업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지속 가능한 청년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부와 교육계의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전문 교육 과정의 질적 수준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 끌어올리는 한편, 비행훈련의 타임빌딩 애로사항처럼 국내 인프라의 한계로 인해 청년들이 겪는 병목 현상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 한 관계자는 '청년들이 고환율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국내에서 내실을 다질 수 있도록, 실무 중심의 교육 인프라 확충과 규제 완화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