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본사 회의실. 이 회사 대표는 최근 유럽의 완성차 업체로부터 받은 한 통의 서한을 보여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한에는 협력사의 인권 보장 현황, 아동 노동 유무, 그리고 원자재 조달 과정에서의 환경 오염 방지 대책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데이터와 제3자 검증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기한 내에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향후 거래가 중단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여졌다. 대기업의 1차 협력사로서 탄탄한 기술력을 자랑하던 이 기업조차 유럽발 '공급망 실사'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글로벌 규제의 패러다임 전환이 우리 수출 기업들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겨지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이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강력한 무역 장벽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특히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본격화는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 우리 산업계의 생존을 가르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을 옥죄는 'ESG 실사'의 칼날
EU CSDDD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대해 자체 사업장뿐만 아니라 협력사의 인권 및 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제도다. 이는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에 수출하는 대기업들은 규제 준수를 위해 공급망에 속한 국내 중소·중견 협력사들에게 동일한 수준의 ESG 데이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낙수효과처럼 국내 모든 제조 기업들이 실사 대상이 되는 셈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중소·중견기업 중 실사 대비 체계를 제대로 갖춘 곳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문 인력 부족과 비용 부담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인권 실사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데만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비용이 소요되지만, 경기 침체 속에서 이를 감당할 여력이 있는 중소기업은 흔치 않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대기업은 자체적인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지만, 협력사들의 준비 부족이 결국 대기업의 공급망 리스크로 전이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고관세 장벽으로 다가오다
또 다른 거대한 파도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등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을 EU로 수출할 때, 해당 제품의 탄소 배출량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과하는 일종의 '탄소 관세'다. 현재는 과도기 단계로 배출량 보고 의무만 있지만, 2026년부터는 실제 비용 부담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철강 등 대유럽 수출 비중이 높은 우리 주력 산업은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산정하고 이를 검증받는 과정 자체가 고도의 기술과 비용을 요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심의 한국 산업 구조상 탄소 배출을 단기간에 극적으로 줄이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교한 탄소 배출량 측정 시스템(MRV) 구축과 저탄소 공정 전환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시급한 시점이다.
민관 협력의 입체적 대응과 선제적 인프라 구축 시급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를 개별 기업의 각자도생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입체적인 지원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선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실사 대응 가이드라인을 고도화하고, 탄소 배출량 측정 및 검증 비용을 직접 지원하는 바우처 사업을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대기업과 협력사가 함께 상생하는 '공급망 ESG 생태계' 조성이 필수적이다. 대기업이 협력사의 ESG 역량 강화를 기술적·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정부는 이에 대해 세제 혜택 등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국가 차원의 공인된 탄소 배출량 검증 기관을 확충하여 기업들이 해외 검증 기관에 지불하는 막대한 비용과 정보 유출 우려를 줄여주어야 한다.
결국 EU의 공급망 규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자 글로벌 스탠다드다. 이를 단순한 규제나 비용 부담으로만 인식하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제적으로 공급망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기업만이 미래 글로벌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지금의 위기를 체질 개선의 기회로 삼는 민관의 지혜와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