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에서 40년간 사과를 키운 한 농부가 2년 전 강원도 평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가 남긴 과수원 부지는 지금 복숭아밭이다. 청송이 사과의 고향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풍경이다. 이상고온이 반복되면서 경북 저지대의 사과 착색 불량과 낙과 피해가 해마다 심해졌고, 결국 그가 선택한 건 '더 높은 곳'이었다.

이 장면은 한반도 농업 지형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고 있는지를 압축한다. 농촌진흥청 분석에 따르면 사과 주산지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북상해 강원 고지대와 경기 북부까지 올라왔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한반도에서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더 올라갈 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밥상 위의 기후변화, '기후플레이션'의 실체

과일값 폭등은 더 이상 계절적 현상이 아니다. 기후 충격이 생산량을 흔들 때마다 소비자 가격이 뛰는 이른바 '기후플레이션'이 구조화되고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사과 소매가격이 전년 대비 수십 퍼센트 오른 시기가 반복됐고, 배·포도 등 다른 과일로도 파장이 번졌다. 품목별 주산지가 이동하면서 기존 생산 인프라와 유통망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도 가격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재배지가 바뀌면 선과장부터 냉장 물류망까지 모든 게 다시 깔려야 한다.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가 부담한다.

기상 이변이 잦아질수록 단년도 작황 예측도 어려워진다. 봄 냉해와 여름 폭염이 같은 해에 덮치는 경우가 늘고 있어, 농가는 작목 선택부터 수확 시기 조정까지 매 시즌 도박에 가까운 판단을 내려야 한다. 40년 경험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농가들은 말한다.

품종 개량과 스마트 과수원, 얼마나 현실적인가

정부가 내놓은 처방은 두 갈래다. 하나는 고온에 강한 신품종 개발이다. 농촌진흥청은 착색에 낮은 일교차가 필요 없는 내서성 사과 품종 연구를 진행 중이며, 일부는 시험 재배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신품종이 농가에 정착하고 소비자 입맛에 자리 잡기까지는 통상 10년 안팎의 시간이 걸린다. 지금 당장의 위기를 틀어막을 카드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생산성 혁신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기후변화 대응 차원에서 생산성을 2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스마트 과수원 특화단지 조성에 나서고 있다. 센서와 자동화 장비로 온도·습도·병해충을 실시간 관리해 기상 충격에 덜 흔들리는 재배 환경을 만드는 방식이다. 유통 측면에서도 산지 직거래와 온라인 유통 비중을 35%까지 끌어올려 사과·배 유통비용을 10% 절감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된 상태다. 유통 단계를 줄이면 가격 변동성도 어느 정도 완충할 수 있다는 논리다.

다만 스마트 과수원 도입 비용은 일반 농가가 자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초기 설비 투자와 운영 기술 습득 모두 진입 장벽이 높다. 정부 지원이 대규모 법인 위주로 집중될 경우, 소농·고령 농가는 기후 충격에 더 취약한 채 남겨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장에서 나온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적응 전략의 속도

일본은 이미 아오모리 사과 산지 붕괴에 대비해 10년 전부터 품종 다양화와 생산지 분산에 나섰다. 내서성 품종 '후지' 계통을 개량해 규슈 지역까지 재배지를 넓혔고, 동시에 소비자 인식 전환을 유도해 '덜 붉은 사과'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다. 우리의 경우 소비자들이 여전히 붉고 단단한 사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품종 전환 속도를 시장이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간극이 존재한다.

과일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사과 한 개 가격이 오를 때 실질 체감 물가가 함께 오른다. 추석 선물세트 가격이 뛰면 중산층 소비 심리에도 파문이 번진다. 기후 위기를 농업 문제로만 가둬두면 해법도 좁아진다. 재배지 북상이 멈추지 않는 한, 과일값 불안도 멈추지 않는다. 품종 개량의 속도와 유통 혁신의 깊이가 그 간격을 얼마나 좁힐 수 있을지, 앞으로 10년이 사실상의 임계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