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예언했다. 「한 세기 안에 인류는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다.」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고, 풍요가 여가를 채울 것이라는 낙관이었다. 그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평균 연간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을 오르내린다. 케인스의 예언은 틀렸다. 아니, 정확히는 — 절반만 맞았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그만큼 더 일했다.

그 맥락에서 주4일제 논의는 단순한 근무 일정 조정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선언에 가깝다. 2024년 4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함께 '주4일제 네트워크'를 출범시키며 주당 40시간인 법정 근로시간을 단계적으로 단축하자고 요구하고 나섰다. 노동계가 이념적 노선을 넘어 같은 깃발 아래 선 것은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그만큼 장시간 노동에 대한 피로감이 바닥을 향해 누적되어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 실험이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아이슬란드는 2015년부터 4년에 걸쳐 공공 부문 노동자 2,500여 명을 대상으로 주4일제 시범 운영을 했고, 생산성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높아졌다는 결과를 내놨다. 영국의 비영리단체 '4데이위크 글로벌'이 주도한 기업 실험에서도 참여 기업 다수가 제도를 영구 도입했다. 숫자는 설득력이 있다. 집중도가 높아지고 이직률이 떨어지며, 병가 사용도 줄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절반짜리 분석이다. 아이슬란드의 실험 대상은 주로 사무직·공공 서비스직이었다. 같은 실험을 제조업 야간 교대 노동자나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그대로 이식할 수 있을까. 한국 경제의 허리를 떠받치는 중소기업, 특히 납기와 물량에 쫓기는 제조·물류 현장에서 「금요일 휴무」는 구호로는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발주처 앞에 무릎 꿇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비용은 고스란히 사업주와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될 공산이 크다. 주4일제가 대기업 사무직의 복지 프리미엄으로만 굳어질 경우, 그것은 노동시간의 단축이 아니라 노동 격차의 확대다.

반론을 인정한다. 제도가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회적 변화도 균열 없이 시작되지 않았다. 주5일제 도입 당시에도 「중소기업이 버틸 수 없다」는 경고가 쏟아졌지만, 결국 산업은 적응했고 삶의 방식은 변했다. 변화의 고통은 있었으나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주4일제 역시 그 선상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시간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함께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회의를 줄이고, 보고 체계를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대면 문화를 혁파하지 않으면 같은 일을 나흘 안에 욱여넣는 「압축 노동」이 될 뿐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번아웃의 해결책이 아니라 또 다른 강도 높은 노동의 포장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노동계의 요구, 기업의 실험, 해외의 사례 — 이 세 줄기가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물길로 합류하려면 법제도의 유연한 설계와 업종별 차등 적용이라는 섬세한 통로가 필요하다. 성급한 일률화는 현장을 무시한 선의이고, 무기한 유보는 시대를 외면한 관성이다.

케인스의 예언이 빗나간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인간이 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4일제라는 실험의 진짜 가치는 나흘이냐 닷새냐의 산수가 아니라, 우리가 왜 일하는지를 다시 묻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