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만 5,000가구. 전체 가구 열 집 가운데 세 집 이상이 혼자 산다. 2025년 말 공표된 공식 통계가 확인한 숫자다. 1인 가구 비율이 36.1%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장이다. 「한국 사회의 기본 단위가 바뀌었다.」
이 숫자가 공개된 직후, 어김없이 한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싱글세. 혼자 사는 사람에게 추가 세금을 물리거나 복지 혜택을 줄여 결혼과 출산을 유도하자는 발상이다. 처음 들으면 황당하지만, 이 아이디어가 계속 돌아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방법이 잘 안 들으니까. 수십조 원을 쏟아부어도 합계출산율이 0점대를 맴도는 나라에서, 정책 입안자들의 조급증은 점점 거칠어진다.
역사는 이 조급증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준 전례가 있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1966년 낙태와 피임을 전면 금지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자는 국가의 적'이라는 논리를 제도화했다. 출산율은 일시 반등했다. 그러나 국가가 강요한 아이들은 보살핌 없이 고아원을 채웠고, 결국 그 분노가 체제 붕괴의 불씨 중 하나가 됐다. 강압은 숫자를 잠깐 바꿀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못한다.
싱글세 논리의 가장 큰 허점은 전제가 틀렸다는 데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가 '세금 부담이 낮아서'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 외곽 반지하 월세방에서 야근을 반복하는 30대가 결혼을 미루는 건 세금 계산기를 두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도 직장에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없고, 두 사람이 벌어도 전셋값을 감당하기 어렵고, 육아를 나눠줄 공동체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외면한 채 결과에 벌금을 매기는 건 열이 나는 환자에게 체온계를 숨기는 처방과 같다.
물론 반대 진영의 논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1인 가구가 늘어날수록 복지 재원은 분산되고, 다자녀 가구에 집중돼야 할 지원이 희석된다는 우려는 재정 현실로서 타당한 측면이 있다. 세대 간 연대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세금 구조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도 논리 자체는 성립한다. 그러나 '혼자 사는 것에 벌칙을 준다'는 설계와 '아이를 낳는 것에 실질적 보상을 준다'는 설계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더라도 전혀 다른 길이다. 하나는 공포를 동력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선택을 동력으로 삼는다.
자발적 결혼과 출산 환경을 만드는 일은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든다. 공공 보육 인프라를 �촘하게 짜고,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이 인사 불이익을 받지 않는 직장 문화를 만들고, 청년이 수도권이 아니어도 괜찮은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지역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 모든 것은 임기 안에 표로 돌아오기 어려운 정책들이다. 싱글세가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빠르고 눈에 보이고, 무엇보다 비용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의 삶의 형태에 벌칙을 매기기 시작하면, 잃는 것은 출산율 통계 이전에 신뢰다. 804만 명이 혼자 산다는 사실은 단순한 인구 데이터가 아니라, 수백만 개의 개별 사연이다. 이혼 후 홀로 서는 중년, 지방에서 홀로 올라온 청년, 사별 후 남겨진 노인—이들에게 「왜 혼자 사느냐」는 세금 고지서를 보내는 나라가 과연 아이를 낳고 싶은 나라인지, 한 번쯤 물어볼 일이다.
씨앗은 땅이 갖춰졌을 때 싹을 틔운다. 벌금으로 뿌리를 내리게 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