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야구장 3루 내야석.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이미 자리는 채워진다. 응원가를 외우고, 구단 굿즈를 두른 채, 상대 팀 선수의 수비 실책에 탄식하는 이들. 그리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다. 이것이 2024년 한국 프로야구의 실제 풍경이다.
지난해 KBO 리그는 사상 처음으로 단일 시즌 1000만 관중을 돌파했다. 숫자 자체도 놀랍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더 흥미로운 지형이 펼쳐진다. 야구 중계 시청자 수는 전년 대비 약 30% 급증했고, 이 중 여성 시청자 비중이 43%에 달했다는 집계가 나왔다. 과거 야구는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스포츠」로 불렸다. 그 공식이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무너졌다.
물론 여성 팬의 야구장 유입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야구 오빠」 문화가 짙게 깔린 2000년대부터 여성 팬층은 꾸준히 존재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스포츠 소비가 아닌 연예 소비」라며 팬덤의 진정성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 시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선수 외모와 스타성이 입장권 판매를 견인하는 측면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은 핵심을 비껴간다. 소비의 동기가 무엇이든, 야구장 안에 들어선 순간 경기는 시작된다. 규칙을 배우고, 팀을 응원하고, 패배에 분노하며, 다음 경기를 기다린다. 그 경험이 쌓이는 순간, 동기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도 처음엔 신의 축제를 핑계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무엇이 자라났느냐다.
경제적 효과는 숫자로 말한다. 여성 팬은 굿즈 소비, 식음료 지출, 원정 관람 등에서 평균 지출 규모가 크다는 분석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CJ온스타일이 2026년 4월 야구팬을 겨냥한 전문 기획전을 열기로 한 것도 이 흐름을 읽은 판단이다. 유통 대기업이 야구 시즌에 맞춰 팬덤 소비 시장으로 직접 진입한다는 것은, 야구장이 이제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하나의 소비 생태계가 됐음을 뜻한다.
이 변화는 구단 운영 방식에도 압력을 가한다. 과거엔 성적과 선수층이 흥행의 거의 전부였다. 지금은 다르다. 화장실의 청결도, 굿즈의 심미성, 응원 문화의 포용성, SNS에서 팀이 어떻게 보이는가—이 모든 것이 관중 유치의 변수가 됐다. 야구장 경험 전체를 설계하는 일이 구단의 핵심 역량이 된 것이다.
비판적 시선도 있다. 팬덤 소비가 과열될수록 야구의 본질인 「경기」가 배경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다. 입장권을 사고 굿즈를 사도 정작 경기 내용에는 무관심한 관중이 늘어나면, 스포츠의 긴장감과 서사가 희석된다는 논리다.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성 팬덤의 유입이 스포츠 문화를 더 정교하게 만들어온 사례는 세계 곳곳에 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가족 관람객과 여성 팬층을 적극 끌어들이며 글로벌 리그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000만이라는 숫자는 기록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변화는 숫자 너머에 있다. 야구장이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공간이었다면, 지금 그 공간은 재편 중이다. 광장은 누가 더 오래 머물렀느냐가 아니라, 지금 누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느냐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새로운 팬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야구를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