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의 빌라 세입자 김모씨(38)는 지난해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같은 집에서 다시 전세로 살 것인가, 아니면 월세로 갈아탈 것인가. 그의 선택은 월세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2~3억 원을 맡겼다가 돌려받지 못하면 끝장이잖아요.」 수도권 일대를 강타한 전세 사기 사태가 그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공포였다.
그의 선택은 이제 통계로 확인된다. 국토교통부 주택 거래 통계에 따르면 2026년 1~4월 서울 주택 전월세 거래 중 월세 비중은 70%에 달했다. 빌라를 비롯한 비아파트의 경우 그 수치는 78.7%까지 치솟는다. 서울에서 빌라에 새로 세 들어 사는 사람 열 명 중 여덟 명은 이미 월세 입자다. 전세는 제도로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먼저 퇴장하고 있다.
전세 사기가 당긴 방아쇠, 월세 전환의 가속
전세 제도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다. 저금리 시대에는 집주인이 보증금 운용으로 수익을 낼 수 있었기에 전세가 유지됐다. 그러나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집주인의 셈법이 바뀌었고, 전세 사기 피해가 사회적 충격으로 번지면서 세입자의 심리도 근본부터 흔들렸다. 공급과 수요 양쪽이 동시에 전세를 밀어냈다.
문제는 속도다. 월세 전환이 이렇게 빠를 경우 가장 먼저 압박을 받는 것은 소득이 낮고 목돈이 없는 계층이다. 전세는 목돈을 맡기는 대신 매달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주거비 절감 장치'였다. 그 장치가 사라지면, 매달 수십만 원에서 백만 원 안팎의 월세가 고정 지출로 굳어진다. 청년, 1인 가구, 고령층, 저소득 가구가 그 직격탄을 맞는다.
안전망의 공백,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현행 주거 안전망은 구조적으로 전세 중심으로 설계된 측면이 강하다. 전세 보증보험, 임차권 등기, 최우선변제권 같은 장치들이 주로 전세 계약을 전제로 작동한다. 월세 세입자를 위한 보호막은 상대적으로 얇다. 월세 계약에서 집주인의 일방적인 갱신 거절이나 급격한 임대료 인상을 막을 현실적인 수단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임대차 전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해외 사례는 시사점을 준다. 독일은 오랫동안 월세 중심 임대 시장을 운영하면서 임대료 인상률 상한제, 임차인 퇴거 요건 엄격화, 공공 임대주택 비중 확대를 통해 세입자를 보호해왔다. 오스트리아 빈은 전체 주택의 60% 이상이 공공 혹은 비영리 임대 주택으로 구성돼 있어 민간 시장 의존도 자체를 낮추는 모델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공공임대 비중은 이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전세를 대체할 모델, 지금 설계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월세 지원금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임시방편적 현금 지원보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임대 관계를 만드는 방향으로 정책 무게 중심이 이동해야 한다는 논리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확충, 장기 임대차 계약 인센티브 제공, 임대료 인상 상한을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집행 체계 강화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또한 전세 보증 사고의 교훈을 반영해 임대차 계약 등록제를 강화하고, 집주인의 채무 상황이나 선순위 권리 관계를 세입자가 계약 전에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다. 결국 전세 사기가 드러낸 것은 정보 비대칭과 구조적 취약성이었다. 같은 실패를 월세 시장에서 반복하지 않으려면, 제도 설계가 시장 변화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월세 비중 70%. 이 숫자는 전세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경보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임대차 질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수백만 세입자의 주거 안정이 결정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시장은 이미 바뀌었다. 정책이 따라잡을 시간이 많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