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불 꺼진 방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만 빛난다.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전쟁 소식, 경제 붕괴 경고, 혐오 댓글, 또 다른 재난. 무서운데 끊지 못한다. 불안한데 더 본다. 심리학자들은 이 행동에 이름을 붙였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파국을 뜻하는 'doom'과 스크롤을 합성한 이 단어는 이제 사전보다 일상에 먼저 자리 잡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올해 3월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는 이 풍경을 숫자로 확인해 준다. 2025년 기준, 우리나라 스마트폰 이용자 중 과의존 위험군 비율은 22.7퍼센트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 비율은 10대와 20대에서 특히 가파르다.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뇌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뇌는 원래 위험 신호에 민감하도록 설계됐다. 생존을 위해서였다. 나쁜 뉴스에 눈길이 꽂히는 건 본능이다. 알고리즘은 이 본능을 정확히 겨냥한다. 분노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다시 클릭하게 만든다. 플랫폼이 감정을 먹고 자라는 구조다.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설계된 공포의 회로 안에서 하루를 소비한다.

물론,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디지털 정보 소비 자체를 병리화하는 건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다. 뉴스를 챙기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 시민의 덕목이기도 하지 않느냐고. 맞다. 알 권리와 참여 의지를 무조건 불안의 산물로 환원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소비의 끝에 행동이 있어야 한다. 분노가 참여로, 불안이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 청년들이 경험하는 건 그 반대다. 스크롤이 끝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무력감만 쌓인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들은 이 상태를 '습득된 무기력'의 디지털 버전으로 분석한다. 나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감각이 강화된다. 그 결과, 현실의 관계와 몸의 감각은 점점 흐릿해진다. 친구를 만나기 귀찮아지고, 책 한 페이지를 읽는 집중력이 사라지고, 햇빛 아래 서는 일이 낯설어진다. 화면 안의 재난은 생생한데, 화면 밖의 삶은 무감각해지는 역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해 있다.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다. 그는 오래도록 인간다운 삶을 미뤄왔던 사람이었다. 둠스크롤링의 위기도 그렇게 온다. 극적인 붕괴가 아니라, 조용하고 느린 잠식으로.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무언가를 원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 뒤에야 알아채는 것이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플랫폼의 알고리즘 설계에 공중보건의 시선을 들이미는 일,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초등학교 교과 수준으로 체계화하는 일, 청년 정신 건강 지원 창구를 '있다'에서 '쓸 수 있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 이 중 어느 것도 지금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청년 스스로가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 세상을 알기 위해 이걸 보는가, 아니면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보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손가락은 비로소 잠깐 멈출 수 있다. 삶은 늘 그 멈춤 이후에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