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7.5.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 건물들이 연쇄 붕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수십 초였다. 수천 명의 사망자가 우려되는 이 재난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내진 설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노후 건축물과 작동하지 않은 대피 체계가 빚어낸 복합 실패다.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한반도의 지반이 예상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흔들리는 한반도, 과소평가된 위험
한국은 오랫동안 '지진 안전지대'로 여겨졌다. 그 인식이 흔들린 건 2016년이다.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 지진이 발생하며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포항에서는 규모 5.4 지진이 도심을 강타해 주택 수천 채를 손상시키고 이재민 1,700여 명을 발생시켰다. 포항 지진은 이후 지열발전소 물 주입과의 연관성이 공식 확인되며 '촉발 지진' 사례로 국제적으로도 기록됐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규모 2.0 이상의 지진은 연평균 70~80회 수준으로 관측된다. 체감할 수 있는 규모 3.0 이상도 매년 10회 안팎 발생한다. 판 경계부에 위치한 일본이나 대만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지진 무풍지대'라는 표현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인식의 갱신이 정책과 현장 모두에서 충분히 빠르지 않다는 점이다.
내진 설계 의무화, 그 이면의 공백
국내 내진 설계 의무화는 1988년 6층 이상 건축물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됐다.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기준이 강화돼 현재는 2층 이상 또는 연면적 200㎡ 이상 건축물에 내진 설계가 요구된다. 제도의 외형은 갖춰진 셈이다.
그러나 내진 보강이 완료된 공공시설 비율은 절반을 넘기지 못하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민간 건축물로 범위를 넓히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1988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 즉 내진 기준 자체가 없던 시절의 구조물이 전국 노후 주거지와 구도심에 빽빽이 들어서 있다. 서울 단독주택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수도권 직하 지진이 발생할 경우, 카라카스와 다른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비용 문제도 현실적 장벽이다. 기존 건물에 내진 보강을 적용하는 데는 건물 규모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소요된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업이 운영 중이지만 예산 규모와 신청 접근성 모두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다.
매뉴얼과 현장 사이의 거리
2026년 6월 열린 '제9회 재난안전 지진포럼'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날카로운 진단을 내놓았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매뉴얼도 현장의 실행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종이에 불과하다.」 이 발언은 의례적 축사가 아니라, 현재 한국 지진 대응 체계의 핵심 취약점을 정면으로 짚은 것으로 읽힌다.
실제로 포항 지진 당시 일부 대피소는 준비 미비로 이재민 수용에 혼선을 빚었고, 주민들은 지진 발생 직후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몰라 거리를 배회했다. 지진 대피 훈련이 학교와 공공기관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고령층이나 외국인 거주자 등 정보 접근이 취약한 계층은 사실상 훈련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점도 구조적 문제로 지목된다.
도시 밀도가 높아질수록 지진 피해의 파급 효과는 커진다. 건물 붕괴 자체보다 가스관 파열, 화재, 교통 마비, 통신 두절이 맞물리는 복합 재난 시나리오가 더 현실적 위협이다. 서울의 경우 지하 공간 이용률이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만큼, 지하철과 지하상가의 내진 성능 및 대피 동선 확보는 별도의 정밀 검토가 필요한 영역이다.
베네수엘라의 잿더미는 묻고 있다. 기준을 만드는 것과 기준을 지키는 것 사이,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과 몸이 그 매뉴얼을 기억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한반도가 그 질문에 답을 갖추기 전에 땅이 흔들린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