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어느 섬마을. 뱃길로 두 시간, 의사는 없고 약국도 없다. 여든 둘의 할머니가 무릎이 부어올라도 갈 곳이 없다. 보건지소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읍내 병원 예약은 석 달 뒤다. 이것이 지금 이 땅의 현실이다. 수도에서 KTX로 두 시간이면 닿는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 같은 해에 벌어지는 일이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초 발표한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1,084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인구의 20%를 웃도는 수치다. 통계학적으로는 '초고령사회' 진입이지만, 숫자보다 더 냉혹한 것은 그 뒤에 붙는 현실이다. 그 천만 명 가운데 상당수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교통 수단이 없거나, 디지털 기기를 다루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의료 접근성이 가장 낮은 바로 그 사람들이, 의료가 가장 절실한 나이에 도달해 있다.
원격의료 논의는 오래됐다. 너무 오래됐다. 2000년대 초부터 시범사업을 반복하면서도 본격적 제도화는 번번이 미뤄졌다. 의사와 환자가 대면하지 않고 진료하는 행위를 허용하면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우려,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이 심화된다는 경고, 그리고 의료 민영화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는 경계심이 번갈아 논의의 발목을 잡아왔다. 이 목소리들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의료는 실수의 비용이 생명인 영역이다.
그러나 반대론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할 시점이 왔다. 지금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의료의 질이 아니라 의료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도시 병원의 대면 진료 수준을 기준 삼아 제도를 막는 동안, 섬마을 할머니의 무릎은 계속 부어오른다. 완벽한 시스템을 기다리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불완전하지만 지금 당장 손을 내미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윤리적인가.
일본은 2018년 원격진료 가이드라인을 전면 개정해 만성질환 환자와 고령자에 대한 비대면 진료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의 원격의료 수가 체계를 영구적으로 확대했다. 두 나라 모두 완벽한 해법을 갖춘 뒤 움직인 것이 아니다. 현실의 압박 앞에서 먼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규칙을 다듬었다.
물론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이 두려운 노인에게 앱 하나를 건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원격의료가 실질적인 안전망이 되려면, 디지털 접근성 교육과 보조 인력, 처방 이후의 약 전달 체계, 그리고 이상 징후를 현장에서 감지하는 방문 간호 시스템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기술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노인이 화면 앞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의료가 노인에게 다가가는 구조여야 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맸다」고 썼다. 우리의 원격의료 논의가 꼭 그렇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걷기를 멈춘 것이다. 천만 노인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화면 너머로 손을 뻗는 일,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사람이 그 손에 닿지 못한 채 기다림 속에서 늙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