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 잠실구장 3루 쪽 외야석.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은 20대 여성 네 명이 각자 구단 굿즈 가방에서 응원 도구를 꺼냈다. 손목 밴드, 포토카드, 한정판 유니폼. 경기 스코어보다 선수 특집 포토북을 먼저 펼쳤다. 이들에게 야구장은 스포츠 관람 공간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을 채울 '콘텐츠'였다.
KBO리그가 2024시즌 누적 관중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정확히는 1,088만여 명으로, 전년도 대비 약 30%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단순한 야구 붐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구장 안팎의 풍경이 10년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누가 야구장을 채우는가
프로야구 구단들의 자체 집계와 업계 분석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관중 증가를 주도한 핵심 층은 2030 여성이다. 이전까지 프로야구 팬의 중심은 중장년 남성이었다. 그 공식이 깨졌다. SNS에서 선수를 '최애'로 삼고, 직관(직접 관람)을 인증하고, 팀 굿즈를 수집하는 문화가 야구장 입장권 수요를 끌어올렸다.
이 변화의 촉매는 콘텐츠였다. 유튜브와 숏폼 플랫폼에서 야구 선수 개인의 일상·훈련·인터뷰 영상이 폭발적으로 소비됐다. 경기 결과를 몰라도 특정 선수의 팬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 팬덤 커뮤니티 운영자는 「야구를 잘 몰라도 좋아하는 선수 보러 가는 건 아이돌 콘서트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야구는 '스포츠 팬덤'과 '아이돌 팬덤'의 문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공간이 됐다.
구장이 달라지자 사람이 몰렸다
팬덤의 변화만으로 천만 관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구단과 KBO의 인프라 투자가 맞물렸다. 각 구장은 먹거리 다양화, 포토존 설치, 한정판 굿즈 연계 이벤트를 경쟁적으로 늘렸다. '야구장 먹방'이 SNS 콘텐츠로 자리 잡으면서, 구단 전용 메뉴를 먹으러 경기장을 찾는 관중도 생겼다.
경제적 파급도 커졌다. 구단 MD(상품) 매출은 수년 새 몇 배로 뛰었고, 인근 상권 매출도 홈경기 일정에 연동해 움직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말 야간 경기가 있는 날 구장 주변 식당은 예약을 받지 않으면 앉을 자리가 없다. 프로야구가 지역 소비 경제의 정기 엔진이 된 셈이다.
일본 NPB(일본 프로야구)가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야구장 나들이' 문화를 KBO는 훨씬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다만 일본이 지역 밀착 연고제를 뿌리로 삼는 데 비해, 한국은 SNS 팬덤과 온라인 커뮤니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다. 지역 기반 없이도 팬덤이 작동하는 구조다.
천만 이후, 어떤 질문이 남는가
물론 이 흥행이 탄탄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팬덤 소비 문화는 특정 선수의 이탈이나 성적 부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이돌 팬덤이 그렇듯, 충성도는 높지만 변동성도 크다. 구단 입장에서는 콘텐츠 소비자를 장기 팬으로 전환하는 것이 다음 과제다.
청룡기 고교야구 응원 문화 논란처럼, 야구 문화 내부의 갈등도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저변이 넓어질수록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고, 그 조율이 리그 전체의 품격을 결정한다. 천만 관중은 도착점이 아니다. 이제 막 새로운 판이 시작됐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