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국은행이 2025년 2월 발표한 'AI와 한국경제' 보고서가 내놓은 숫자다. 국내 근로자 열 명 중 셋에 가까운 이들이 AI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어들 위험이 높은 집단에 속한다. '높은 노출도·낮은 보완도' 그룹으로 분류된 이들의 공통점은 뚜렷하다. 데이터 입력, 문서 처리, 반복적 고객 응대 같은 단순 사무 업무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이 수치가 무서운 이유는 속도다. 기술 대체는 과거 산업화 시대처럼 수십 년에 걸쳐 완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생성형 AI 기반 업무 자동화 도구는 이미 국내 주요 금융사와 공공기관에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 문서 검토와 데이터 정리 업무에서 사람 손이 빠지는 속도는 실무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을 수준으로 빨라지고 있다.
누가 가장 먼저 밀려나는가
위험 집단의 윤곽은 비교적 선명하다. 정형화된 절차를 반복하는 사무직, 콜센터 상담원, 데이터 검증 인력이 핵심이다. 이들 직군은 AI가 특히 강점을 발휘하는 영역인 패턴 인식, 분류, 요약과 직접 경쟁한다. 반면 의사결정, 대인 관계, 창의적 판단이 핵심인 직무는 상대적으로 대체 속도가 느리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령과 학력 변수도 작용한다. 40~50대 중장년 사무직 근로자는 디지털 전환 적응력이 상대적으로 낮고, 전직 훈련 이력도 얇은 경우가 많다. 이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재취업까지 걸리는 시간이 청년층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 고용보험 수급 기간이 소진된 이후의 공백을 메울 제도적 장치가 현재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노동 연구계에서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전직 지원 체계,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다
정부가 운영 중인 국민내일배움카드와 고용센터 전직 지원 프로그램은 구조 자체는 갖춰져 있다. 그러나 훈련 과정의 내용이 현장 수요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꾸준히 제기된다. AI 전환이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인 업무 영역에 맞는 재훈련 과정이 실제로 얼마나 공급되고 있는지, 중장년 사무직 이탈자들이 그 과정에 얼마나 진입하는지에 관한 공개 데이터는 아직 제한적이다.
비교 사례는 해외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은 단기 노동 제도(Kurzarbeit)를 활용해 기업이 인력을 즉각 해고하는 대신 근무 시간을 줄이고 그 공백을 정부 보조금으로 채우며 재훈련 기간을 확보하는 방식을 운용해왔다. 싱가포르는 SkillsFuture 제도를 통해 전 국민 직업 훈련 크레딧을 지급하고 AI 관련 역량 전환 과정을 집중 지원한다. 두 모델 모두 공통적으로 '사전적' 접근, 즉 일자리를 잃기 전에 역량을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한국의 현행 체계는 대체로 '사후적'이다. 실직 이후 지원이 작동하는 구조다. 그러나 AI 대체가 특정 직군 전체를 동시에 압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실직 후 대응만으로는 재취업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요 집중이 발생할 수 있다.
시사점: 속도의 문제, 그리고 선택의 시간
국내 근로자 27%라는 수치는 경고등이다. 그것이 내년 안에 일어날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현장에서 시작된 변화가 어느 임계점을 넘는 순간, 사후 대응으로는 늦는다. 훈련 한 사이클에 걸리는 시간, 고용 시장이 새 직무 수요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중장년 근로자가 새 기술을 체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모두 더하면 지금 당장 체계를 재설계해도 빠듯하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특정 '업무'라는 시각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업무가 누군가의 생계 전부였다면, 그 구분은 당사자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정책이 답해야 할 질문은 결국 하나다. 이 전환의 속도와 충격을 누가 감당하게 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