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조·유통 중소기업 300곳에 물었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같은 중국 이커머스 플랫폼의 국내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피해를 체감하느냐고. 돌아온 답은 충격적이다. 96.7%가 '그렇다'고 답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25년 7월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다. 사실상 전부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중소 제조사가 손을 든 셈이니, 이 숫자는 산업 전반의 위기 신호로 읽어야 한다.
같은 시장, 다른 규칙
문제의 핵심은 가격이 아니다. 규칙이다. 국내 플랫폼 사업자는 전자상거래법·소비자보호법·KC 인증 의무·관세 규정 등 촘촘한 법적 요건을 준수해야 한다. 반면 해외 직구 방식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물건을 파는 C커머스 플랫폼은 상당수 규제를 사실상 우회해왔다. 특히 150달러(미국 기준) 이하 소액 수입품에 적용되던 면세 특례는 중국산 초저가 상품의 국내 유입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했다. 국내 제조사가 원가에 세금·인증비·물류비를 얹어 내놓은 가격과, 이 모든 비용을 생략한 C커머스의 가격이 같은 소비자 앞에 나란히 놓이는 구조다.
KC 인증 하나만 봐도 차이가 선명하다. 국내 유통 중소기업이 신제품 하나를 시장에 내놓으려면 적게는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의 안전 인증 비용을 부담한다. 시간도 수개월이 걸린다. 그 사이 알리·테무에서는 인증 여부가 불분명한 유사 제품이 수일 안에 소비자에게 배송된다. 이것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다.
제조 생태계, 왜 더 취약한가
유통 마진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제조 기반 자체가 흔들리면 복원이 어렵다. 국내 중소 제조업체는 대부분 특정 카테고리에 집중된 소품종 다품목 구조다. 생활용품·완구·의류·주방기기 같은 분야는 C커머스 플랫폼의 핵심 공세 영역과 정확히 겹친다. 납품 단가 압박이 심해지면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고, 가동률이 떨어지면 숙련 인력이 빠져나간다. 한번 무너진 제조 클러스터는 다시 세우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은 산업 재편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준 패턴이다.
단순히 중소기업의 매출 감소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내 제조 생태계가 얇아질수록 대기업 공급망의 하방 안정성도 흔들린다. 부품·소재·완제품을 잇는 수직 연계 구조에서 중소 제조사는 중간 매개체이자 기술 저장소 역할을 한다. 이 고리가 끊기면 산업 전체의 복원력이 약해진다.
역차별 해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정부는 소액 면세 기준 축소와 해외 플랫폼의 KC 인증 의무화 방향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행 속도는 시장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우선 적용 가능한 조치로는 세 가지 방향이 거론된다. 첫째, 해외 직구 플랫폼에 대한 소비자보호 의무 적용 범위 명확화다. 현재는 해석의 여지가 넓어 실질적 집행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째, KC 인증 대상 품목의 병행 수입 단계에서의 검증 강화다. 제품이 소비자 손에 닿기 전 관문을 실질화하자는 취지다. 셋째, 중소 제조사의 인증 비용 경감이다. 규제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국내 기업의 부담을 낮추는 투트랙 접근이 필요하다는 논거다.
핵심은 C커머스를 막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소비자 선택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사업자에게 다른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경쟁 그 자체를 왜곡한다. 96.7%라는 수치가 정책 입안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누가 이 시장의 '규칙'을 쓰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