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을 겨냥한 소장이 쌓이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을 상대로 제기한 D램 가격 담합 집단소송은 단순한 민사 분쟁이 아니다. 미국 반독점법상 손해배상은 실제 피해액의 3배까지 부과되는 '징벌적 손해배상' 구조를 따른다. 수조 원대 배상 청구가 현실화할 경우, 이는 기업 재무구조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할 수 있다.
소송의 구조와 재무적 파급력
D램 담합 집단소송은 미국 내 PC·스마트폰 소비자들이 반도체 가격 인상으로 최종 제품 가격이 올랐다고 주장하며 제기하는 방식이다. 과거 2002~2006년 D램 담합 사건 당시 삼성전자는 미국 법무부와의 합의로 3억 달러 이상의 벌금을 납부했고, 이후 민사 소송 배상액까지 더하면 실질 비용은 훨씬 컸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이번 소송의 배경에는 2016~2018년 D램 슈퍼사이클이 있다. 당시 D램 가격은 불과 2년 만에 3배 이상 급등했고, 시장 집중도가 높은 과점 구조 속에서 가격 동조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게 원고 측 논리의 핵심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3사가 글로벌 D램 시장의 95% 이상을 점유하는 구조는 반독점 당국과 소비자 단체 양쪽 모두에게 의심의 눈길을 사게 만든다.
사내변호사 영입 경쟁, 전략적 선택인가 방어적 대응인가
2026년 6월 법조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형 로펌 출신의 M&A 전문 사내변호사 영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경력 5~10년 차 실무형 인력에 집중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구간은 법정 전략을 직접 설계하면서도 외부 로펌과의 조율 창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실행력'의 황금 구간이다.
M&A 전문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소송 리스크 관리다. 글로벌 소송에서는 기업 인수·합병 과정의 계약 구조, 자산 분리, 지식재산권 귀속 여부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고, 이를 선제적으로 정리해 두지 않으면 소송에서 불필요한 취약점을 노출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성장 전략이다. 미국·유럽 정부가 자국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해 보조금을 쏟아붓는 가운데, 현지 파트너십·합작법인·기술 라이선스 협상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법무 역량이 곧 협상력이다.
글로벌 사법 리스크, 한국 기업의 구조적 취약점
한국 대기업의 법무 조직은 오랫동안 '방어'보다 '사후 처리'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는 지적이 법조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미국·유럽 기업들이 법무팀을 사업 전략 수립 초기 단계부터 참여시키는 것과는 다른 문화다. 독일·일본의 주요 제조기업들은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사내 법무 조직을 단순 계약 검토 기능에서 리스크 인텔리전스 기능으로 전환했다.
반도체 산업은 특히 취약하다. 특허 분쟁, 수출 규제 위반, 환경·노동 기준 소송, 반독점 집단소송이 동시다발로 진행될 수 있는 구조다.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유럽·중국·인도에서 각각 다른 법적 환경을 마주하며 소송을 병행 관리해야 한다. 이를 외부 로펌에만 의존할 경우 정보 비대칭과 전략 일관성 부재라는 이중 비용이 발생한다.
이번 사내변호사 확충은 단기적으로는 D램 소송 방어막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법무 체계 전반을 외부 의존에서 내부 역량 중심으로 전환하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문제는 속도다. 소송은 이미 진행 중이고, 인력 육성에는 시간이 걸린다. K-반도체가 법정에서 이기는 것만큼이나, 법정에 서지 않도록 구조를 짜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더 절실한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