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7.5.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에서 건물이 무너졌다. 연쇄 강진이 이어지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우려된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숫자에 이미 익숙하다. 익숙하다는 것이 문제다.

같은 규모의 지진이 일본 도쿄를 강타했다고 상상해보라. 세계는 즉각 들끓을 것이다. 구조대가 날아들고, 위성이 실시간으로 피해 지역을 중계할 것이다. 그러나 카라카스는, 아이티는, 모잠비크는 다르다. 뉴스는 잠깐 타오르다 꺼진다. 재난의 규모가 아니라, 재난이 덮친 나라의 '국력'이 비극의 크기를 결정하는 시대다.

이것이 재난 양극화의 본질이다.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폭풍, 홍수, 가뭄, 지진 해일의 피해는 취약국에 기하급수적으로 집중된다. 온실가스를 가장 적게 배출한 나라들이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이를 두고 기후 정의 논자들은 '역사적 배출 책임'을 묻는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대기를 채운 탄소의 대부분은 지금의 선진국들이 쏟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 청구서는 방글라데시 해안 마을과 사헬 지대의 농부들에게 날아든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제 원조가 이미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고, 취약국 내부의 부패와 거버넌스 실패가 피해를 키운다는 지적은 일부 타당하다. 원조가 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의존성만 심화시킨다는 비판도 오래된 논쟁이다. 그러나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당신들 나라가 못 다스려서 그렇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구조적 원인을 개인과 국가의 실패로 치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편리한 면죄부다.

지난해 7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2차 '손실과 피해 기금' 이사회에서 한국 정부는 7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93억 원의 신규 출연 계획을 발표했다. 작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후 취약국들이 매년 입는 피해 규모와 비교하면 망망대해에 던진 돌멩이이기도 하다. 의미 있는 첫걸음인가, 아니면 면피성 제스처인가. 그 판단은 이후의 행동이 결정할 것이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는 「공화국의 힘은 시민의 안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명제를 지구 단위로 확장하는 상상력이다. 재난 앞에서의 불평등은 도덕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스템의 문제다. 조기경보 시스템, 내진 설계 기술, 재난 대응 역량 — 이 모든 것이 돈과 연결돼 있고, 돈은 불균등하게 분배돼 있다. 기술이 있어도 전달되지 않고, 자금이 약속돼도 집행이 늦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손실과 피해 기금은 또 하나의 선언으로 남는다.

베네수엘라의 잔해 속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도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그 소리가 우리에게 닿는 데 필요한 것은 위성도, AI도 아니다. 들을 의지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불평등의 공모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