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그 불로 인간은 문명을 세웠고, 그 문명의 연기가 지금 하늘을 덮고 있다. 신화는 언제나 예언이다. 우리는 또 다른 불을 찾아 나섰다. 이름하여 기후테크(Climate Tech). 탄소포집 기술, 인공 강우, 태양광 지붕, 수소 연료전지. 기술의 목록은 길고 찬란하다. 문제는 그 목록이 길어질수록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미루는 핑계도 함께 길어진다는 데 있다.

기후테크에 쏟아지는 민간 투자 규모는 수백조 원 단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은 탄소를 땅속에 묻는 기술을 팔고, 정부는 탄소중립 로드맵에 기술 혁신이라는 항목을 굵게 박아 넣는다. 기술이 해결할 것이다. 그 한 문장이 회의실과 정책 보고서를 지배한다. 기술 만능주의(Techno-solutionism)라고 부를 만한 이 믿음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편안한 미신이다.

물론 기술의 성과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태양광 발전 단가는 10년 사이 90% 가까이 떨어졌고, 전기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는 해마다 갱신된다. 기후테크가 탄소 감축의 핵심 수단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술은 조건이지 답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연장을 쥐어줘도 쓸 마음이 없으면 집은 지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탄소중립 포인트제 사례는 이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친환경 행동에 포인트를 지급하는 이 제도의 참여자 수는 제도 시행 이후 가파르게 늘어 특정 연도 말 기준 180만 명을 넘어섰고, 해당 연도에만 148억 원어치의 포인트가 지급됐다. 숫자만 보면 고무적이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실제 탄소 감축 효과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환류하는 체계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민이 움직였는데, 제도가 그 움직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행동은 있고 구조가 없다. 이것이 지금 한국 기후 정책의 맹점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후테크가 개인의 행동 변화를 대체할 수 있는가. 탄소포집 기술이 상용화되더라도 우리가 소비하는 방식, 이동하는 방식, 먹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멍 난 욕조에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일과 다르지 않다. 기후과학자들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기술 전환과 행동 전환은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제도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개인의 선한 의지는 구조 앞에서 쉽게 꺾인다. 대중교통이 불편하면 전기차를 사도 결국 도로 위 정체의 일부가 된다. 건물 에너지 효율 기준이 느슨하면 아무리 좋은 히트펌프를 달아도 열은 새어 나간다. 기후테크가 뿌리를 내리려면 그것을 받아줄 제도의 토양이 먼저 단단해야 한다. 탄소세, 건물 에너지 기준 강화, 친환경 행동에 대한 실질적 인센티브 설계, 이것들은 기술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결국 제우스의 분노를 샀다. 기술만능의 낙관론도 마찬가지로 언젠가 청구서를 받아들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그 기술을 올바르게 쓰겠다는 의지와 그 의지를 받쳐줄 사회적 구조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기후 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다루는 인간의 문제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실행을 기술에 미루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