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이었다. 학교 교문을 나서다 군복을 입혀졌고, 총을 쥐었고, 전선으로 끌려갔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 아이들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은 수십 년을 침묵 속에 살았다. 그리고 2014년,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된 그들이 마침내 국가를 상대로 목소리를 냈다.
6·25 전쟁 당시 강제 징집된 소년병들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것은 2014년의 일이다. 이들의 논지는 단순했다. 법적 징집 연령에 미달한 미성년자를 강제로 전쟁터에 내몬 것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15년 이 청구를 기각했다. 청구 기간을 이미 넘겼다는 이유였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묻고 싶다. 자신이 소년병이었다는 사실조차 국가로부터 공식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어떤 기간 안에 무엇을 청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국가가 6·25 참전 소년병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 자체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존재를 인정받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는데, 권리 구제의 시계는 이미 멈춰 있었다. 이것은 절차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동원한 몸에 대해 국가가 어떤 책임을 지는가, 라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다.
참전 소년병 문제를 단순히 복지나 보훈의 영역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은 좁다. 이것은 역사 기록의 문제다. 전쟁을 수행한 국가가 동원 과정에서 저지른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기억하며, 어떻게 책임지느냐의 문제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징용된 이들에 대해 수십 년에 걸쳐 법적·재정적 배상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 중 미성년으로 복무한 사례를 별도로 기록하고 특별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의 소년병들은 지금 어디쯤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연평부대를 방문해 「징집병 최소화」 방침을 언급했다. 미래의 병사들에게 더 나은 복무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발언이 설득력을 갖추려면, 과거에 국가가 강제로 끌어간 가장 어린 병사들의 이야기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 미래의 약속은 과거의 청산 위에서만 신뢰를 얻는다.
소년병들의 평균 나이는 이제 아흔에 가깝다.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헌법소원 기각 이후 법적 구제의 길은 사실상 닫혔지만, 입법부가 별도의 특별법을 통해 예우와 기록의 체계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몇몇 의원들이 관련 입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소년병들을 얼마나 주변부에 두어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총을 든 것도 국가의 명령이었고, 그 이후 70년을 침묵한 것도 사실상 국가가 만든 구조였다. 이제 국가가 먼저 말을 걸 차례다. 기억은 살아 있는 자들이 만들지만, 역사적 책임은 국가만이 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