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말했다. 「선물은 주는 자의 마음이 아니라 받는 자의 위치가 결정한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명제는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더 절실하다.

한 고위직 인사의 자택 현관에 고가의 선물 꾸러미가 놓였다. 보내는 쪽은 「오랜 인연에 대한 작은 성의」라 불렀고, 받는 쪽은 「사양하기 어려운 교분」이라 기억했다. 그런데 법원은 달리 읽었다. 「교분상 필요를 넘어선 명백한 뇌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포장지를 걷어내자 그 안에 있던 것은 성의가 아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선물을 관계의 언어로 써왔다. 명절마다 과일 상자를 들고 어른을 찾아가는 문화, 신세 진 이에게 식사 한 끼를 대접하는 예의는 분명 공동체를 잇는 온기다. 이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온기가 권력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오는 순간, 성격이 바뀐다는 데 있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권력은 주변의 호의를 굴절시킨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25년 8월 발표한 실태 점검은 그 굴절의 규모를 수치로 보여줬다. 2016년 9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공직사회의 금품 수수 관행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긍정적 지표와 함께, 여전히 법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경계선 위의 선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법이 선을 그었지만, 선물을 보내는 자들은 그 선 바로 아래에 멈추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선의를 처음부터 의심하는 사회가 건강한가? 모든 선물을 범죄의 전조로 읽는 것은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반론은 결정적인 전제를 빠뜨린다. 문제는 선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오가는 구조다. 인·허가권을 쥔 공무원,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 예산을 배분하는 정치인. 이들에게 건네진 선물은 처음부터 대등한 교환이 아니다. 한쪽에 권력이 있는 순간, 나머지 한쪽의 선물은 투자가 된다.

동양 고전 『한비자』는 일찌감치 경고했다. 「군주가 호오(好惡)를 드러내면 신하는 그것을 겨냥해 꾸민다.」 권력자의 취향이 알려지면, 그 취향에 맞는 선물이 몰려든다. 이것이 뇌물의 생태다. 명시적 청탁이 없어도,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그 의미를 안다. 법정에서 「그저 아는 사이라서」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다.

사법부의 판결은 냉정하다. 그러나 그 냉정함이 오히려 사회를 지킨다. 「교분상 필요를 넘어선」이라는 표현은 단지 법률 문구가 아니다. 권력 주변의 관계에서 '필요'의 기준을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건넨 것이라도, 그것이 권력의 그늘 아래 놓이는 순간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선물은 마음이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마음은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