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연방헌법에 상원의 인준 조항을 새겨 넣었을 때, 그들이 꿈꾼 장면은 이런 것이었다.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이 공개된 자리에서 국가 운영의 비전을 설명하고, 의원들이 그 역량과 철학을 날카롭게 따지는 것. 권력을 견제하되, 국가를 경영할 사람을 고르는 행위였다. 그것이 청문회의 원형이다.
한국의 인사청문회는 어디쯤 와 있는가. 후보자의 군 복무 기록, 자녀의 학교생활, 배우자의 과거 직업이 마이크 앞에 펼쳐지는 동안, 정작 그가 맡을 부처의 예산 구조나 정책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은 뒤로 밀린다. 청문회장은 어느새 신상을 해체하는 공개 법정이 됐고, 국민은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며 정치 혐오를 키운다.
숫자가 이 현실을 냉정하게 증언한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는 출범 후 2년여 만에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한 공직 후보자가 20명을 훌쩍 넘어섰다. 문재인 정부 임기 전체와 맞먹는 수치가 불과 2년 남짓 만에 쌓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야가 번갈아 집권하면서도 이 숫자는 줄지 않았다. 제도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제도를 다루는 방식이 고장난 것이다.
물론 반론은 있다. 공직자의 도덕성 검증은 정책 역량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탈세나 위장전입처럼 법 앞에 서야 할 사안이라면 청문장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청문회는 그 선을 한참 넘어섰다. 검증이 아니라 소비가 목적처럼 보일 때가 많다. 후보자를 흠집 내 반대 진영을 흔들려는 계산이, 국민을 위한 인재 검증보다 앞선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법리학자 론 풀러는 법의 도덕성을 논하며 「절차가 목적을 배반할 때 법은 공허해진다」고 했다. 청문회도 다르지 않다. 절차는 남아 있지만 목적은 사라진 제도, 형식은 작동하지만 정신은 멈춘 제도가 지금의 청문회다. 후보자가 어느 부처를 어떤 철학으로 이끌 것인지, 예산 배분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지, 관련 정책의 국제 흐름을 어떻게 읽는지를 묻는 질문이 청문회의 중심에 서야 한다.
개선의 실마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청문회 질의 시간 내에 정책 검증 비중을 명시적으로 늘리거나, 후보자가 사전에 상세한 정책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제도화하는 방안이 꾸준히 거론된다. 일부 의원들이 정책 질의로 청문회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사례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제도 자체보다 의지가 문제라는 뜻이다.
여야 모두 야당일 때는 청문회를 공세의 무기로 쓰고, 여당이 되면 「청문회가 정치 공세로 변질됐다」고 토로한다. 이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유능한 인재가 청문회 앞에서 발을 빼고, 정부는 공백을 메우느라 허둥대며, 정책은 표류한다.
청문회를 바꾸는 것은 법 개정이나 제도 손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원 한 명 한 명이 마이크 앞에 앉아 무엇을 물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다. 그 선택이 모여 청문회의 품격이 되고, 그 품격이 민주주의의 얼굴이 된다. 법복을 입지 않은 재판관들이 피고석에 앉힌 것이 사람인지, 아니면 정책인지—그 차이가 나라의 수준을 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