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1일부로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규제의 그물망을 한 칸 더 조였다. 중국 기업이 해외 자회사를 경유해 첨단 AI 칩을 들여오는 우회 수입 경로를 원천 차단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최종 모회사가 중국계'인 해외 법인까지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싱가포르·말레이시아·두바이 등지에 설립된 중국계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우회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이제 단순한 미·중 기술 경쟁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재설계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우회로가 막히면 무엇이 바뀌나
BIS의 이번 조치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복합적인 파장을 낳는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를 이행하는 한국 기업들에 유리한 환경처럼 보인다. 중국계 경쟁 기업들이 첨단 공정에 필요한 장비와 칩을 합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복잡하다. 한국 반도체 수출의 상당 비중이 중국 시장을 향하고 있는 구조에서, 규제 범위 확대는 한국 기업의 중국 내 매출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에 주요 생산 거점을 두고 있으며, 장비 반입 제한이 강화될수록 현지 공장의 기술 고도화에 제약이 생긴다. '규제의 수혜자'인 동시에 '규제의 피해자'라는 이중적 위치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갈등이 단기간에 봉합될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는 2022년 10월 조치 이후 매년 범위를 확대해왔다.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고 있으며, 화웨이가 독자 공정으로 7나노급 칩을 양산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기술 추격이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보여준다. 규제와 자립 사이의 경주는 앞으로도 수년간 이어질 구조적 갈등이다.
기술 초격차,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
이 구도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명확하다. 규제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방향이 유효하다.
첫째, 최첨단 공정의 선점이다. TSMC가 2나노 공정 양산을 준비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수율 안정화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다. 수율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정 미세화는 숫자에 불과하다. 엔비디아·애플·퀄컴 같은 팹리스 고객사들이 위탁 생산처를 선택하는 기준은 공정 세대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납품할 수 있느냐다.
둘째,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의 격차 유지다. AI 연산의 병목은 연산력이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이며, 이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현재 엔비디아 H100·H200 시리즈의 핵심 HBM 공급사 지위를 점하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가 확대될수록 HBM 수요는 구조적으로 늘어난다. 이 우위를 지키는 것이 단기 매출을 넘어 전략적 포지션을 확보하는 길이다.
셋째, 소재·장비 공급망의 자립도 제고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네덜란드 ASML에 전량 의존하는 현실은 또 다른 취약점이다. 미국이 동맹국들과 협력해 대중 수출 통제를 조율하는 방식은, 반대로 특정 장비의 수출이 정치적 변수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는 리스크도 내포한다. 국내 반도체 장비·소재 기업들의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생태계 투자가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 안보 차원의 과제가 된 이유다.
지정학 리스크를 흡수할 구조를 만들어야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진짜 시험은 규제 그 자체가 아니다. 미·중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려운 구조적 딜레마 속에서, 어느 편에도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기술적 독립성을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 시장에서는 첨단 로직과 HBM으로, 중국 시장에서는 규제 대상 외 레거시 제품과 솔루션으로 포트폴리오를 분리하는 이중 전략이 현실적 접근일 수 있다. 그러나 레거시 시장은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내재화하고 있다. 시간은 한국 편이 아니다.
첨단 공정에서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공급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지정학적 변수를 기술로 흡수하는 유일한 방정식이다. 규제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그 파고를 넘는 기술이 없는 기업은 파도에 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