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100만 배럴.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약 20%가 폭 54킬로미터의 좁은 해협을 통과한다. 호르무즈 해협이다. 이란과 아라비아반도 사이에 끼인 이 수로가 막히면, 한국 정유사들이 받아야 할 탱커가 멈춘다. 이론이 아니다. 이미 수차례 현실 위기로 번진 시나리오다.
지정학적 긴장이 다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란·미국 간 핵협상이 교착 상태를 반복하고,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이 이어지면서 페르시아만 일대의 불안정성은 구조적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입장에서 이 해협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원유 수입의 절반 이상이 거기서 온다.
중동 의존도, 처음으로 60%대로 내려앉다
그나마 수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업계 및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26년 3월 국내 정유사들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62.9%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의 73%와 비교하면 10.1%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정유사들이 미국산 셰일오일, 서아프리카산, 캐나다산 등 대체 원유 도입을 확대한 결과다.
수치만 보면 성과처럼 읽힌다. 그러나 맥락을 따지면 다르다. 62.9%는 여전히 세 배럴 중 두 배럴이 호르무즈를 통과한다는 뜻이다. 해협이 2주만 봉쇄돼도 국내 정유 설비 가동률에 직접 충격이 온다. 비축유 운용 기간이 제한적이고, 비중동산 원유의 운송 루트는 더 길고 비싸다.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과 '즉각 전환 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공급망 충격의 파급 경로
호르무즈 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충격은 에너지 가격에만 그치지 않는다. 원유 수입 차질 → 정제 마진 압박 → 석유화학 원료 공급 불안 → 플라스틱·합성섬유·반도체 봉지재 등 중간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가 한국 제조업 공급망에 내재해 있다. 한국은 원유를 태워 전기를 만드는 단계를 넘어, 원유에서 추출한 나프타를 산업 전반의 기초 원료로 쓴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안보가 사실상 같은 문제인 이유다.
운임도 변수다. 홍해 우회 항로가 장기화하면서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오는 탱커의 항해 거리는 약 40% 늘어난다. 운임 상승분은 결국 정유사 원가에 반영되고, 그 끝은 주유소 가격표다. 소비자 물가로 전이되기까지의 시간은 과거 사례 기준 통상 2~6주 안팎으로 분석된다.
다변화의 방향: 루트보다 구조를 바꿔야
수입선 다변화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문가들이 거듭 지적하는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전략비축유의 실효적 확대다. 현재 법정 비축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실제 공급 충격 시나리오별로 운용 계획이 구체화돼 있어야 한다. 둘째, 카타르·사우디·UAE 등 중동 산유국과의 장기 공급 계약 다층화다. 단순히 계약 물량이 아니라 대체 선적항, 우회 루트 조건을 계약에 명시하는 구조적 접근이 요구된다. 셋째,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기저 확대를 통한 석유 의존 절대량 자체의 감축이다. 수입선을 아무리 다변화해도, 원유 소비 총량이 줄지 않으면 취약성의 크기는 그대로다.
한국이 이미 보여준 62.9%라는 숫자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위기 신호에 반응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반응 속도가 아니라 구조다. 호르무즈가 닫히고 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