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국회를 통과한 재정수반법률 253건. 그 가운데 추계가 가능한 133건만 추려 분석해도 숫자는 선명하다.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년간 연평균 4조 8,064억 원의 재정 소요가 발생한다. 법안 하나하나는 '지원 확대', '혜택 강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총합은 매년 약 5조 원짜리 청구서로 국민 앞에 돌아온다.
법안의 계절, 선심의 계절
국회 회기가 열릴 때마다 의원 발의 법안은 쏟아진다. 선거 주기와 맞물리면 그 속도는 더 빨라진다. 아동수당 확대, 노인 의료비 경감, 중소기업 금융 지원 강화 — 개별 법안의 명분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이 법안들이 재정 전체 그림과 분리된 채 각개격파로 통과된다는 점이다. 한 법안의 통과가 다른 법안의 재원을 잠식하거나, 5년 뒤 의무지출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은 심의 과정에서 충분히 따져지지 않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법안마다 비용추계서를 첨부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추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120건은 분석 대상에서 아예 빠졌다. 재정 영향이 불분명한 법안일수록 심의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역설이다.
견제 기구는 있다, 힘이 없을 뿐
미국 의회예산처(CBO)는 1974년 설립 이후 주요 법안마다 독립적 비용추계를 내고, 그 결과가 입법 과정에서 실질적 변수로 작동한다. 영국의 예산책임청(OBR)은 정부 재정계획의 독립적 검증자로 기능하며, 낙관적 성장률 가정으로 포장된 예산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보고서를 공개 발표한다. 캐나다 의회예산처(PBO) 역시 정부 발표 수치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별도 전망치를 내놓는다.
한국의 국회예산정책처도 법적으로는 독립 분석 기관이다. 그러나 비용추계서 제출이 형식 요건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추계 결과가 본회의 표결에 직접적인 제동 장치로 연결되는 구조는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분석은 있되, 그 분석이 입법 속도를 늦추는 힘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검증대를 세우는 법
논의되는 개선 방향은 두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일정 규모 이상의 재정 소요가 예상되는 법안은 상임위 심의 전에 예산정책처의 독립 추계를 의무적으로 거치도록 절차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현재는 추계서가 있어도 심의 일정에 쫓겨 실질 검토 없이 넘어가는 사례가 발생한다. 추계 결과가 소위원회 심의 자료로 자동 편입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출발점이다.
둘째, 예산정책처의 인력과 권한을 CBO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다. 추계 인력이 부족하면 분석의 질이 떨어지고, 그 결과는 다시 추계 불가 판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미 CBO는 250명 이상의 전문 인력을 상시 운용하며 법안별 10년 추계를 표준으로 삼는다. 단기 비용만 제시하고 10년 이후 재정 부담을 시야 밖에 두는 관행은, 법안의 진짜 가격표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연평균 4조 8,000억 원. 이 숫자는 2024년 한 해 가결 법안만의 5년 평균치다. 매 회기 누적되는 재정 의무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그때 가서 고칠 수 있는 법안은 더 이상 없다. 검증대는 사후 감사가 아니라 사전 관문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