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의 한 금속 부품 제조업체 대표는 올해 초 거래처로부터 낯선 요청서를 받았다. 납품 계약 갱신 조건에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 증빙」 항목이 새로 붙어 있었다. 직원 70명, 연 매출 150억 원 규모의 이 회사가 태양광 설비를 자체 설치하려면 수억 원의 초기 투자가 필요하다. 금융비용과 공장 지붕 구조 보강까지 합치면 5억 원을 훌쩍 넘는다는 게 시공 업체의 견적이었다. 그는 「거래처가 요구하는 건 이해한다. 근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차 등 국내 대기업들이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달성을 선언하면서 1·2차 협력 중소기업에도 재생에너지 전환 요구가 빠르게 내려오고 있다. 애플·구글 같은 글로벌 바이어들 역시 공급망 전체의 탄소발자국을 따지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이 RE100을 충족하지 못하면 납품 자격 자체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왜 중소기업에게 유독 가혹한가
RE100 대응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자체 재생에너지 설비 투자, 녹색프리미엄 전기 구매,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가 그것이다. 대기업은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을 맺거나 대규모 설비 투자로 단가를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협상력도, 자본력도 다르다. 녹색프리미엄 전기는 한국전력을 통해 추가 요금을 내는 방식인데, 에너지 비용이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제조 중소기업에게 이 부담은 결코 작지 않다. REC 구매 역시 시장 가격이 불안정해 장기 원가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꾸준히 나온다.
자체 설비 투자는 더 높은 벽이다. 공장 지붕 면적이 좁거나 구조적으로 태양광 패널을 얹기 어려운 노후 시설이 많고, 임차 공장이라면 건물주 동의 문제까지 얽힌다. 에너지 전문 컨설팅 인력을 갖춘 중소기업도 거의 없다. 제도는 있어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간극이 구조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예산은 늘었다, 하지만 '어디에' 쓰이느냐가 문제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26년도 기후에너지환경부 예산안에는 RE100 산업단지 조성, 영농형 태양광, 해상풍력 확대를 위한 재생에너지 금융지원 예산이 2025년 3,263억 원에서 2026년에 대폭 증액되는 내용이 담겼다. RE100 산업단지는 단지 내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공급해 입주 기업이 별도 투자 없이 RE100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속도와 접근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RE100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실제 중소기업이 입주해 혜택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문제다. 지금 당장 바이어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기업에게 「3년 후 완공 예정 산단」은 현실적 해법이 아니다. 기존 산업단지나 농공단지에 흩어져 있는 제조 중소기업들을 어떻게 포괄하느냐는 질문에도 아직 명확한 답이 없다.
전문가들은 단기·중기·장기 지원을 동시에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적으로는 중소기업 대상 녹색프리미엄 요금 보조나 REC 구매 바우처 제도가 필요하고, 중기적으로는 공동 PPA 참여 플랫폼 구축, 장기적으로는 RE100 산업단지 확충이 맞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형 재생에너지 공동 구매 모델도 검토할 만한 방향으로 거론된다.
공급망 탈락은 곧 매출 절벽
RE100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 중소기업이 공급망에서 이탈할 경우, 그 충격은 개별 기업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특정 산업 클러스터 전체의 경쟁력이 무너질 수 있다. 자동차, 전자, 철강 등 국내 주력 제조업의 글로벌 공급망 지위가 탄소 이슈 하나로 흔들리는 구조가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6년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 탄소 집약 품목을 EU에 수출하는 기업은 탄소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한다. 대기업이 그 비용을 공급망 전체에 배분하는 과정에서 중소 납품업체들이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을 가능성이 높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이미 전환됐다.
예산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그 돈을 실제로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쓸 수 있는지가 정책의 실효성을 가른다. 자본도, 인력도, 정보도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의 탄소 기준을 충족하려면, 정부 지원이 「있다」는 것과 「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