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은 날, 그는 처음으로 이력서를 펼쳤다. 20년 넘게 레슬링 매트 위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직업란'은 공란이나 다름없었다. 선수 경력은 빽빽했지만, 고용시장이 요구하는 자격증도, 학위도, 경력증명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운동을 가르치는 것뿐이었는데, 레슬링을 배우겠다는 아이들은 그의 고향 소도시에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인기 종목 은퇴 선수들의 현실이다. 축구나 야구 스타들의 화려한 은퇴 기자회견, 수십억 원대 해설자 계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펜싱, 유도, 카누, 핸드볼—이름조차 낯선 종목에서 청춘을 바친 선수 대다수는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회적 지지망의 바깥으로도 함께 밀려난다.

선수 시절이 길수록 은퇴 후 격차는 벌어진다

엘리트 체육 시스템 안에서 자란 선수들은 어린 나이부터 학업보다 훈련을 우선으로 요구받는다. 중학교 시절부터 전국대회를 순례하고, 고등학교 때는 이미 합숙 생활이 일상이 된다. 운동부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일반 학생과 같은 방식으로 취업 준비를 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렵다. 선수 생활을 일찍 접는 경우 사정은 더 나쁘다. 부상으로 20대 중반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면, 이렇다 할 학력이나 직무 경험 없이 노동시장에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격차는 은퇴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의 선수들은 코치, 해설, 스포츠 마케팅 등 체육 연관 직종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다. 반면 비인기 종목 선수에게 그런 자리는 전국에 몇 개 되지 않는다. 지자체 체육회 일자리는 경쟁이 치열하고, 학교 체육 교사 자리는 정식 임용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간제 강사 자리를 전전하다가 체육과 무관한 일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시스템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부도 이 문제를 방치하지는 않았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체육인 복지법 시행령에 근거해, 2025년 5월부터 은퇴 체육인의 진로 불안정 해소와 경제적 자립을 돕는 '체육인 직업안정 지원' 사업을 본격 가동했다. 이력서 작성 컨설팅부터 취업 연계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하겠다는 구상이다. 뒤늦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담 인력과 취업 연계 기업의 수가 제한적인 데다, 정작 지원이 절실한 소외 종목 선수들에게 정보가 제때 닿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한 현역 시절부터 병행 교육—직업 탐색, 재무 교육, 자격증 취득 지원—을 체계적으로 받아야 은퇴 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데,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은 여전히 현역 성과에 자원을 집중하는 구조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질적인 교육·취업 연계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촉구가 체육계 안팎에서 잇따르는 이유다.

해외는 어떻게 준비시키나

국제 비교를 해보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영국 올림픽위원회 산하 '퍼포먼스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은 현역 선수 재직 시절부터 진로 코칭을 의무적으로 제공한다. 호주 스포츠연구소(AIS)는 대학 학점 이수와 인턴십을 훈련 일정 안에 통합해 설계한다. 선수가 경기장 밖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코치와 별도로 '라이프스킬 매니저'를 상시 배치하는 구조다. 이들 나라에서 은퇴는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지, 경력의 단절이 아니다.

한국은 올림픽 메달 집계에서 꾸준히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스포츠 강국이다. 하지만 선수를 길러내는 역량과 선수를 보호하는 역량이 같은 수준인지는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메달을 딴 선수가 수년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면, 그것은 개인의 준비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 오류다.

조명이 꺼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 삶을 버틸 준비를, 이제는 선수 혼자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